요즘 읽은 책

04. 고독한 밤의 코코아 : 여자들이여, 남자를 말고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

리_을 2020. 9. 15. 19:27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을 처으으로 읽은 건 24세? 25세 때 쯤 동생의 서울 자취방에서 였다. 낮에 들렸던 서점에서 판촉물로 나눠준 소책자였다. 10개 남짓되는 단편집 중에 2개를 엮었던 소책자였다. 밖에는 눈이 펑펑내리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나간 동생이 걱정되기도 하고, 어린줄만 알았던 동생이 혼자서 살아내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다. 티비가 없던 동생의 방에서 조용한 겨울밤을 훑고 있다가 눈에 들어온 소책자였다. 고독한 밤의 코코아. 지금의 기분이네, 춥지않지만 어딘지 쓸쓸하고 그렇다고 외롭고 슬픈것은 아닌 그런 밤. 제목부터 내 마음에 내려앉았다. 또래 여자들의 겪는 이런저런 연애이야기들 묶음이었다. 적적한 듯 하고 간지러운 듯도 한, 누군가의 읽장을 조용히 읽어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오묘한 두근거림에 반해버렸다. 다음날 서점에 나가 책을 샀다. 그 뒤로는 자칭 팬이 되었다.

문득 거리감을 느낀것은 몇 해 전이다. 도서관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듯 반가운 이름을 보고 빌린 책 한 권에서 어딘가 엇나간 듯 한 이질감을 느꼈다. 춘정 문어발이라는 단편소설집이었다. 음식에 얽힌 남녀에 관해서였다. 어느새 먹어버린 나이때문에 동심을 잃은 걸까? 연애 몇번해봤다고 연애관이 달라진 거였을까? 읽으면서 갸우뚱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다 이번에 책장을 정리할려고 다 시 읽으면서 느꼈다. 10년전 겨울밤에 가슴에 아스라히 퍼지던 설레임이 좋았던 나는 없어졌다고. 이제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빻은 소리들이 군데군데 껴있었다. ‘여자나이 25면 어쩌고 저쩌고’ ‘여자는 이래야되고 남자는 어째야되고’, 남자몰래 남자 옷을 빨아주는게 멋진 여자인건지, 추울지도 모를 남자를 위해 따뜻한 차를 끓이며 기다리는 여자가 좋은 여자인 건지, 대부분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순종적이고 의존적이며 성숙하지 못했다. 1920년대 생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다시 찾아보니 작가 다나베 세이코는 1928년생이다. 언제 썼을지 모를 작품이지만 어찌됐건 까마득한 옛날에 남녀 성역할도 굉장히 수직적인 시대의 이야기들인 것이다. 그러니 간결한 문장들 이면에 고리타분한 캐릭터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시대의 일본여자들이 얼마나 바보같은지, 남자에게 헌신하고 버려지는지, 순진한건지, 미련한건지 궁금해졌고 지금이랑은 크게 다를지도 궁금해졌다. 간헐적으로 갸우뚱 하게 만드는 과거의 성 인식이 함께하는 와중에 문체는 간결하고 술술읽히게 글을 잘썼다. 안좋은 재료가 들어갔단 걸 알지만 뭉근하게 끓이고 졸여서 감칠맛이 착달라붙는 크림스튜같은 맛이다. 왕년의 가수 쿨이 생각났다. 신이나서 따라부르다 보면 가사가 충격적이어서 도덕의식을 무너뜨리는 그들의 노래가 몇곡 떠올랐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은 있었다.
P.98,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까 방송 일을 하며 먹고 살 수 있게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꿔왔다.
P.105, 센다씨는 그렇게 말했지만 어쩌면 세기의 대 걸작일지도 몰라 하면서. 그렇게 스스로 자신하지 못하면 누가 걸작을 쓸 수 있겠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돈벌이가 되지 않는 글을 쓰지만 꾸준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동생도 마찬가지고 서로 편지를 주고 받고 격려하며 글을 써왔다. 하지만 몇번의 도전과 잇따라온 무성과에 글쓰기는 취미로 밀려나고 생활에 치여서 마음속에만 머물렀다. 요즘들어 꾸준한 글쓰기와 열린 시선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혼자서도 작가가 될 수 있고, 출판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며 돈을 만드는 글을 쓸 수 있단 걸 알았다. 역시 비범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조소하기도 했고 너라면 성공 할수 있다고 동생에게 글쓰기를 격려하기도 했다. 스스로는 믿어주고 응원하지 않았나보다. 다시금 읽은 저부분에서 나는 스스로를 얼마나 믿고 남들보다 격려해 주었나 되돌아봤다. 언젠가 쓸지도 모르고 어쩌면 안쓰일지도 모르는 세기의 대걸작을 위해서 오늘은 나는 조금 더 응원해보려 한다.



다른 얘기지만,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란 영화의 원작 소설도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이니 만약, 혹시 그 영화가 맘에 들었던 사람이라면 스녀의 다른 소설도 취향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직 조제~ 물고기를 안봐서 같은 맥락일지 확실치않지만 감수성 깊었던 어린 시절에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책임은 틀림없다.